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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엘레아학파의 주장 몇 가지

by 통하는 정보 2022. 6. 6.

파르메니데스는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의 견해를 품은 대표적 철학저로서 정평을 받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생성 변화의 사실을 강조한 데 대하여, 파르메니데스는 진정한 실재의 불변성 내지 항구성을 강조하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진정한 실재의 불변성 내지 항구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잡다한 유전의 세계, 분명히 우리의 주위에 전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인간적인 범상한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이 세계는 허망한 세계요 비실재적인 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가 비실재적이라는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로는 이 세계에 관해서 우리가 표명하는 모든 의견들이 모순에 차있음을 증명할 수가 있고 또한 모순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떠한 의견이든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 거짓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실재에 관하여 내릴 수 있는 정당한 정의는 오직 한 가지, 즉 불변 부동의 불가분적인 일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적인 대상이나 사건의 실재성을 일소에 부쳐 온 많은 다른 철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기의 적극적인 설을 세우는 일에보다는 잘못이라고 여겨진 것을 공격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

 

그의 말로써 전해 오는 한 단편에서 그는 존재하는 것은 중심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꼭 같게 균형이 잡혀있는 원만한 큰 구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애매한 진술이기는 하나,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에는 아마도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그 연속체에는 안이든 밖이든 결코 공허한 공간은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파르메니데스가 자기의 견해를 변호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오는 논증 방식은 이른바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이 변증법이란 어떤 주장을 부인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그 부인이 논리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그 주장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찰된 사실들이 가지는 감각적인 명증에다 호소하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도리어 이 방법에 의해서 관찰이나 감각적 경험의 모든 사실들이 허망하고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들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밖의 어떠한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또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보라. 이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불생 불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성된다고 가정하여보라. 만일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의해서 생성되었든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생성되었든가 그 어느 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생성할 수가 없으며 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또 존재하는 것은 소멸된다고 가정하여 보라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의해서 소멸되든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소멸되든가 그 어느 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으며, 또 존재하는 것은 만일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한다고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불생, 불멸이다.

 

존재하는 것은 불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변화한다고 가정하여보라. 그러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못 되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든가 또는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함은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은 확실히 거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불변적이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일자에 근거해서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세계는 전혀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앞서 말했듯 귀납법에 의해서 증명하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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